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산속의 긴 하루·제1장
천국
「모래 위 누각」에 처벌을 피한 생존자가 남아있는 것 같다…
페이몬:
여긴 어디야? 이제 다 끝났겠지?
비트루비우스:
맞아, 모두 원래대로 돌아왔어
크샤마:
……
베니피:
……
비트루비우스:
왜 입술을 깨물고 있는 거야? 날 보고 감동해서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아?
크샤마:
푸하하하하하하!
베니피:
하하하하… 크… 샤마 웃으면 안 되지. 다 들켰잖아!
비트루비우스:
너희가 아무리 비웃어도, 난 그다지 부끄럽지 않아
비트루비우스:
사랑과 죽음은 운명이야! 웃음거리가 아니라고!
베니피:
알겠어, 그만 웃을게
페이몬:
그런데 차이틀린트는 어딨어?
비트루비우스:
몰라. 원래대로 돌아온 사람들은 다 문 밖에 있었어.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들 기뻐하며 서로 껴안고 있던걸
비트루비우스:
나는 스카르파한테 사람들을 데리고 중앙 전당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한 뒤, 너희를 찾으러 왔어
비트루비우스:
다들 아직 이 근처에 있을 테니까, 걔도 가까운 곳에 있을 거야
차이틀린트:
이건…
페이몬:
자수정 브로치네
차이틀린트:
내 가방에서 잃어버린 물건 중 하나야. 언니의 것이지
페이몬:
그랬구나… 찾아서 정말 다행이야
베니피:
아마 이 시대의 유물로 분류돼서 여기에 보관한 것 같아
비트루비우스:
네 언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, 사실 그 묘비명은 네 언니 말을 듣고 최근에 떠올린 거야. 수천 년 동안 고민한 건 아니라고
라움힐다:
여기선 죽지 않는다고요? 그럼 멋진 묘비명을 남길 수 없겠네요?
비트루비우스:
그러고 보니 내가 지상에서 죽었다면, 아마 제사장들의 공동묘지에 묻혀 은백색 가지와 함께 잠들었겠지
비트루비우스:
영광스럽긴 하지만, 묘비명을 새길 곳은 없었을 거야
라움힐다:
그런 영광은 싫어요. 전 묘비명을 준비해 뒀거든요
라움힐다:
그건 바로——
베니피:
다들 정말 고마워
페이몬:
그럼 적왕의 동전을 보상으로 줘
베니피:
어쩔 수 없지. 적왕님께 바치는 참회의 경전을 만 번 외운 다음에 줄게
비트루비우스:
베니피는 크샤마한테서 적왕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얘길 듣자마자 거짓말이라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
비트루비우스:
「거짓말하지 마! 이 사기꾼아! 그건 말도 안 돼!」
비트루비우스:
솔직히 말해서, 내 묘비명보다 더 웃긴 것 같아
페이몬:
그렇게 주기 싫으면 됐어
페이몬:
흥, 어차피 우리는 차이틀린트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온 거뿐이니까
페이몬:
그냥 겸사겸사 도와준 거라구!
차이틀린트:
…고마워, 페이몬, 여행자
페이몬:
에이, 우리 때문에 이상한 일에 휘말린 거잖아. 당연히 도와줘야지
베니피:
이봐, 너무 대놓고 사람을 차별하는 거 아니야?
차이틀린트:
아무튼 정말 고마워
페이몬:
이스토리아, 왔구나!
이스토리아:
응, 「모래 위 누각」 사람들이 다 중앙 전당으로 돌아온 걸 보고 달려왔어
이스토리아:
차이틀린트, 잃어버린 물건은 찾았어?
차이틀린트:
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. 다행히 찾았어요
이스토리아:
그거 다행이네
이스토리아:
그런데 말이야, 멜란타와 니힐리타라는 이름의 뜻은 알고 있어?
페이몬:
나부터 말할게, 몰라!
차이틀린트:
네, 「우울」과 「공허」죠
이스토리아:
책을 많이 읽었구나. 우린 취미가 같으니까, 어쩌면 네 언니보다 너와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
차이틀린트:
네, 언니는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었어요. 제가 어릴 때는 이야기도 많이 들려줬죠
이스토리아:
그런 사람이 어쩌다 우울에 사로잡히게 된 걸까?
이스토리아:
물론 내가 말한 우울은, 우리를 내려다보는 그 파수꾼이 아니라 정신 질환인 우울증을 뜻하는 거야
차이틀린트:
…언니가 그런 얘기까지 했나요?
이스토리아:
그래. 네 언니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. 현대인들이 감히 공간의 신전 유적지에 요양원을 세웠다니!
이스토리아:
그거 알아? 옛날 사람들은 우울증을 신체 질환으로 여기고 검은 담즙병이라고 불렀어
이스토리아:
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울증은 정신 문제로 여겨지게 됐지
페이몬:
제대로 된 답을 찾는 데는 늘 시간이 필요하잖아
이스토리아:
오늘날 사람들은 우울증을 보살핌과 약물 치료가 필요한 정신 질환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어
이스토리아:
그리고 내가 살던 시대에는, 이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었지. 천사들이 직접 알려줬거든
이스토리아:
천사와 후세에 등장한 바람 신의 시가 우울증을 치유한다고 해서, 일반인의 위로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건 아니야
차이틀린트:
무슨 말을 하시려는 거죠?
이스토리아:
이건 비밀이니까, 목소리를 낮춰야겠네
이스토리아:
하늘과 공간의 힘을 관장하는 위대한 신이, 왜 자신의 피조물에게 공허와 우울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?
이스토리아:
그건 공감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. 그녀는 전능했지만, 공허함과 인간 마음의 병 앞에선 속수무책이었지
이스토리아:
그래서 그녀는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공허와 우울을 피조물의 이름으로 삼은 거야
페이몬:
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. 이길 수 없는 숙적의 이름은 뭔가 멋지고 강해 보이잖아
페이몬:
내 숙적은 「가난」이랑 「굶주림」, 그리고 「여행자의 부재」야
여행자:
엄청 약해 보이네
차이틀린트:
수천 년에 달하는 지혜는 역시 따라갈 수가 없네요
이스토리아:
하하하, 지혜는 무슨
이스토리아:
난 이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고 싶어. 무슨 말인지 알아?
이스토리아:
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날 찾아와.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거라면, 그것도 괜찮고
차이틀린트:
네… 그럴게요
비트루비우스:
으악!
비트루비우스:
지금 상황에서 이런 말은 사치겠지만, 난 이미 묘비명을 생각해 뒀어. 비웃어도 괜찮아
비트루비우스:
「부디 내 사랑을 파트라폴리스에 있는——」
페이몬:
비트루비우스!
차이틀린트:
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래가 됐네요
베니피:
큰일이다. 슬픈 순간인데도 자꾸 웃음이 나올 것 같아. 나중에 모래화가 풀리면 저 녀석은 쪽팔려서 죽고 싶어 할 거야
차이틀린트:
정말 낙관적이시네요
베니피:
어쨌든 지금은 경비병부터 처리할지, 아니면 생존자부터 수색할지 선택해야 해
베니피:
처음 보는 얼굴이네… 지금 신입이 올라올 리는 없을 텐데?
베니피:
그래도 오른쪽이가 곁에 있는 걸 보니, 도와주러 온 거겠지? 난 베니피야. 적왕님의 육신이 있던 시대에서 왔어
페이몬:
난 페이몬이야, 이쪽은 여행자, 차이틀린트라고 해
페이몬:
우린 현대인이야
베니피:
차이틀린트… 너 혹시 언니가 있어?
차이틀린트:
당신도 제 언니를 아세요?
베니피:
물론이지. 여기선 모두가 친구야. 예전 신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
베니피:
난 적왕의 무덤을 짓던 인부였어.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지
베니피:
그러던 어느 날 사막을 걷다가 갑자기 발탁돼서, 무념무상의 공간에 던져졌지 뭐야… 거기에 한 백 년쯤 있었나?
베니피:
밖으로 나와 보니 여긴 온통 고대 인물들뿐이더라. 적왕보다 더 오래된 인물도 있었지만, 교류는 가능했어
베니피:
그런데 이 신전을 다스리는 신의 자매가, 사막의 건축물은 발탁되지 않았으니 내 기억을 바탕으로 복원하라고 하더라
베니피:
모두의 도움으로 간신히 복원을 마쳤건만, 지금은 보다시피 다시 폐허가 됐어
페이몬:
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어. 밖에 있는 사람 조각은 적왕 시대… 예술품이야?
차이틀린트:
모래로 육체와 생명의 덧없음을 표현한 예술 작품이 아닐까?
베니피:
…언니랑 전혀 안 닮았네.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책 읽는 걸 좋아하지?
베니피:
그건 조각이 아니야. 벌받아 모래로 변한 사람들이지
페이몬:
뭐?!
베니피:
걱정 마, 다들 살아있어. 여기엔 「죽음」이란 개념이 없거든. 문제만 해결하면 모두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
페이몬:
참. 아까 널 구해 준 사람한테 적왕이 직접 하사한 동전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?
페이몬:
분명 엄청 값진 유물이겠지!
베니피:
안 줄 거야! 이건 내 행운의 부적이자, 내가 지상에서 살았다는 걸 보여 주는 유일한 기념품이라고!
페이몬:
쳇,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라면 특별히 자비를 베풀지. 보수는 안 받을게
베니피:
잠깐, 녀석이 찾아온 것 같아! 우리가 너무 오래 떠들었어!
베니피:
지금은 한가하게 수다 떨 때가 아니야. 너, 레무리아 제국 신임 백인대장 정도 실력은 돼?
페이몬:
또 그 소리네. 대체 무슨 기준이야?!
베니피:
후, 정말 대단한걸. 적어도 최정예 백인대장급 실력은 되겠어!
여행자:
적왕 시대에는 자체적인 전투력 평가 체계가 없었나요?
베니피:
진리의 공간에 있는 지식인들이 쓴 전투력 평가가 더 그럴싸했거든
베니피:
역시 배운 사람은 다르다니까
베니피:
그거 알아?
베니피:
에리니에스의 기사들은 한 명당 레무리아 제국의 백인대장 셋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했지만, 에리니에스보다는 반 수 아래였지
베니피:
악어왕 휘하의 메자이는 정예 부대가 아니지만, 마수 처리엔 능숙해. 전투력은 대략…
페이몬:
알았어, 알았어! 일단 네 친구들부터 구하러 가자!
여행자:
난 더 듣고 싶은데
페이몬:
그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되잖아!
비트루비우스:
베니피! 아직 살아 있었구나, 다행이야!
비트루비우스:
물론 여기서 사람이 죽을 수 없다는 건 알아. 내 말은 모래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뜻이야
비트루비우스:
아무튼 무슨 뜻인지 알면 됐어
베니피:
이해했어
비트루비우스:
그리고 너희랑 오른쪽이, 정말 고마워
차이틀린트:
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
베니피와 비트루비우스가 당신을 소개하고,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한다…
비트루비우스:
수석 백인대장 이상의 실력이라니!
페이몬:
나도 네 전투력 평가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궁금해졌어
여행자:
그렇지?
비트루비우스:
그럼,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게
비트루비우스:
베니피는 적왕 시대의 건축 문양과 장식 스타일만 제공했을 뿐이고, 건물의 큰 구조와 동선은 내가 맡고 있어
베니피:
맞아. 도금 시대 건물처럼 보이지만, 사실 모두의 지식이 모여 만들어진 거야
크샤마:
베니피! 오른쪽이! 그리고 라움힐다와 낯선 친구들까지! 다들 고마워!
차이틀린트:
…전 라움힐다의 동생, 차이틀린트예요
크샤마:
그렇구나, 언니랑 정말 닮았네. 둘 다 미인인걸. 나는 크샤마라고 해. 위대한… 아, 무슨 말을 하려 했더라?
크샤마:
그렇구나, 언니랑 정말 닮았네. 둘 다 미인인걸. 난 크샤마라고 해. 위대한 룩카데바타의 시대에서 왔지
크샤마:
아무튼 난 풀의 신님이 아직 작아지기 전의 시대에서 왔어
베니피는 크샤마에게 당신을 소개하고, 비트루비우스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…
그가 수천 년, 어쩌면 수만 년 동안 고민한 끝에 남긴 묘비명까지도 전해 주었다
크샤마:
웃겨 죽겠네
베니피:
난 아무 말도 안 했어,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
크샤마:
숨기긴 힘들겠는데? 앞으로 비트루비우스를 볼 때마다 웃음이 날 것 같아
베니피:
자, 잡담은 이쯤 하자. 여기까지 오면서 빠트린 곳은 없는 것 같네
베니피:
다른 사람은 더 없어?
크샤마:
아마 없을 거야
베니피:
그럼 이 구역의 모래화를 해결할 방법에 대해 아는 거 있어?
크샤마:
이전에 탐색했을 땐 별다른 성과가 없었어. 「모래 위 누각」 사람들은 장치나 과학에 대해 잘 모르거든
크샤마:
그래서 우리가 아는 해결법은 「고모라의 징벌자」를 쓰러뜨리는 것밖에 없어
베니피:
걱정할 필요 없어. 여행자의 전투력은 레무리아 제국 부군단장급이니까
차이틀린트:
아, 또 업그레이드됐네요
크샤마:
하지만 「고모라의 징벌자」는 숨어있어
베니피:
그건 좀 곤란하네
페이몬:
그럼 일단 중앙 전당으로 돌아가는 건 어때?
페이몬:
거기엔 이스토리아와 요세푸스가 있어. 둘 다 아는 게 많으니,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
크샤마:
오, 이스토리아가 무사했구나. 정말 다행이야. 그는 경력도 가장 오래됐고, 아주 학구적인 사람이거든
크샤마:
견문과 역사, 문화 지식만큼은 전 세계에서 가장 해박할 거야
베니피:
그럼 서두르자. 돌아가서 자세히 물어보고, 모두를 빨리 구해내야지!
녹양 서원 곳곳에 이상한 먹물이 떠돌고 있다…
도자:
오래 기다렸지? 자네들도 순조로웠던 모양이군
페이몬:
있잖아. 우리가 가짜 에셔를 만났어
도자에게 방금 겪은 일을 설명했다…
도자:
흥. 멜란타가 직접 개입했나 보군
도자:
그 녀석한테 이름이란 우리가 여기에 왔을 때 찍힌 바코드일 뿐이야
도자:
「마우키」가 에셔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부르던 애칭이란 걸, 녀석이 알 리가 없지
페이몬:
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들 에셔와 친해서, 그를 「마우키」라고 부르는 거였구나
도자:
다들 그의 그림을 보고 좀… 충격받긴 했어도, 그를 싫어하진 않았어
도자:
여기서 공간을 가지고 장난치는 건 꽤 심각한 문제거든
페이몬:
그가 뭘 그렸는지 정말 궁금하네
도자:
기회가 되면 보게 될 거야
도자:
자, 그림은 다 모였지만, 아직 이어지는 느낌이 부족하군. 비록 솜씨는 부족하나, 내가 붓을 들어 사족을 더해 보도록 하지
도자:
카노의 리월 산수화는 내가 가르쳤으니, 내가 한 획을 더해도 불평하진 못할 거야
도자:
아무튼 이 그림을 통해 단청원으로 갈 수 있겠지
도자:
들어가서 하늘의 마음을 따 보게
도자:
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군, 화사첨족과 화룡정점은 얼핏 보기에 비슷하나…
도자:
허나, 그 뜻은 천지 차이지
페이몬:
맞아
도자:
손을 뻗어 그림을 만지고 환상을 깨서 속세로 돌아갈지어다
페이몬:
음,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?
도자:
저 그림을 만지면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야. 뭐, 바깥도 그저 또 다른 허상일 뿐이지만
도자:
저 병풍으로 들어가서
도자:
별을 따 보게
차이틀린트:
이 사진은…
도자:
아, 이건 사진기가 그린 것이지?
도자:
자네 언니가 알려줬지. 지금은 가장 사실적인 그림보다도 더 생생한 도안을 그려내는 물건이 있다고
도자:
우린 그 말을 듣고 큰 관심이 생겼으나
도자:
아쉽게도 당시 네 언니에겐 사진기와 사진이 없었지
도자:
직접 보니, 참으로 생동감이 넘치는군
페이몬:
후후, 어때? 기가 좀 살지? 사진기는 실사 화풍의 정점에 도달했지만, 네 심상 화풍의 상상력에는 아직 무한한 여지가 남아 있잖아
도자:
그건 아니야. 실사 화풍이라 해도, 그 안에는 화가의 감성과 미학이 담겨 있어
도자:
어떤 색은 현실에는 없지만, 우리는 그걸 통해 화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지
도자:
아무리 사실적인 그림이라도 허구와 과장, 모호함이 섞이기 마련이거든. 이 모든 게 기법이자 미학이야
페이몬:
나도 그 정도는 알아. 그냥 그림 한 장 부탁하려고 칭찬한 것뿐이야
페이몬:
화풍에 따라 내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궁금해서 그래
차이틀린트:
다들 고마워
페이몬:
차이틀린트, 내가 이 사진을 자세히 봐도 될까?
차이틀린트:
응, 다 언니가 여행 갔을 때 찍은 풍경 사진들이야
차이틀린트:
언니가 촬영을 부탁한 사람은 실력이 정말 꽝이야. 이 사진은 머리만 겨우 나왔지
도자:
그래도 환하게 웃고 있지 않나?
차이틀린트:
부끄럽네요. 사진의 빛과 구도가 다 엉망이죠? 거리감이나 입체감도 전혀 없고요
도자:
그럴 리가. 난 이게 최고의… 사진이라고 생각해
도자:
자네 언니가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다면, 이건 최악의 풍경화… 아니, 풍경 사진이었겠지
도자:
하지만 자네 언니가 찍혔기에, 이 사진은 소중한 기억을 간직한 증거가 된 거야
차이틀린트:
…조금은 알 것 같아요
차이틀린트:
내 물건은 찾았으니, 도자 씨를 계속 도와주자
도자:
저 그림이 금서축으로 이어지는 것 같군. 명광루로 가는 길이 있는지 살펴보는 게 어떻겠나?
도자:
자네들은 먼저 출발하게
도자:
난 중앙 구역으로 돌아가 모두에게 무사하다는 소식만 전하고, 돌아오도록 하지
도자:
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, 내가 돌아올 때쯤이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
이스토리아:
순조로워 보이네
페이몬:
이스토리아, 넌 웬일이야?
이스토리아:
도자한테서 들었어. 너희가 녹양 서원에 왔다고 해서, 나도 따라왔지
이스토리아:
어때, 물건은 찾았어? 차이틀린트
차이틀린트:
찾았어요
이스토리아:
이번에 녹양 서원에서 찾은 물건은 뭐야? 여긴 화가의 영역이잖아
이스토리아:
뭘 찾았을지 짐작도 안 가는걸
차이틀린트:
언니가 사진기로 찍은 사진이에요
이스토리아:
사진기라… 얼핏 들어본 적은 있어
페이몬:
훗, 유행에 뒤처졌네. 화가들은 다 차이틀린트의 언니한테 직접 사진기 얘길 들어 봤다고
이스토리아:
이곳 사람들은 시각 예술을 다루잖아. 그런 화제가 오가는 건 당연하지
이스토리아:
라움힐다가 나와 가장 많이 나눈 이야기는… 철학이었어
페이몬:
철학!
차이틀린트:
언니가 당신처럼 박식한 분과 철학 이야기를 나눴다니, 상상이 잘 안 가네요
이스토리아:
우린 심오한 철학 논쟁을 한 게 아니라, 주변의 일상을 어떻게 바라볼지 가볍게 이야기했어
이스토리아:
예를 들면, 사람이 살아가며 마주하는 가장 근본적인 철학 문제는, 내일을 계속 살아갈지 말지야
페이몬:
엥?
차이틀린트:
……
이스토리아:
우리가 세상을 연구하는 건 결국, 세상 속에서 의미를 찾기 위함이지
이스토리아:
우리가 신들의 무릎 옆에 있는 아이든, 덧없는 시간의 바람 속에 있는 메아리든 말이야
이스토리아:
하지만 그건 너무 아득한 이야기지. 일반인이 어떻게 자신을 세상과 대등한 존재로 여길 수 있겠어? 평범한 사람에게 세상이란 결국 자기 삶이지
이스토리아:
만약 먼 훗날 모든 것이 공허로 돌아간다면, 지금 우리의 삶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?
이스토리아:
만약 우리의 삶이 끝없는 고통의 바다이고, 세상 또한 고통의 집합체라면?
이스토리아:
이 두 가지 가정대로라면, 사는 것과 죽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어. 오히려 죽음은 해방이라 할 수도 있지
페이몬:
뭐라고 반박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… 그건 좀 아닌 것 같아
차이틀린트:
저희 언니는 뭐라고 대답했죠?
이스토리아:
안 듣는 게 좋을 거야. 「삶에 의미가 없어도 살아가야 한다」고 주장한 건 나였으니까
차이틀린트:
아, 아직 모르시는군요
차이틀린트:
요양원에서 언니의 묘비를 봤어요
이스토리아:
……
차이틀린트:
마지막 순간까지, 언니를 구하려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
이스토리아:
언니의 묘비엔 뭐라고 적혀 있었지?
차이틀린트:
「한 번의 삶은 중요치 않다.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」
이스토리아:
그런가?
이스토리아:
그랬구나
페이몬:
차이틀린트…
이스토리아:
정말 믿기지 않네. 나도 위로해 주고 싶지만…
이스토리아:
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줘
차이틀린트:
위로는 필요 없어요
차이틀린트:
언니의 묘비를 보면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,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어요
차이틀린트:
차라리 울어버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요
이스토리아:
내가 말한 위로는 그런 게 아니야
이스토리아:
나중에 알게 되겠지
페이몬:
안 열리네. 여행자, 한 번 세게 걷어차 봐!
여행자:
(힘껏 찬다)
페이몬:
어때?
여행자:
발이 아파
페이몬:
풉
「마우키」:
안녕하세요? 에셔라고 합니다. 화가로 활동하고 있죠
페이몬:
오, 네가 바로 이스토리아가 말한 「마우키」구나? 기묘한 그림을 그린다고 들었어
「마우키」:
제 이름은 마우키가 아니라 에셔입니다
「마우키」:
우선 따라오시죠. 안전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
페이몬:
우린 안전한 곳을 찾는 게 아니라, 이곳의 문제를 해결하러 왔어
「마우키」:
그런가요? 아무튼 일단 따라오시죠. 문제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
페이몬:
이 열매…
보스:
응응
페이몬:
익었어?
보스:
뭐?
페이몬:
이 열매가 잘 익었냐고
보스:
그건 중요하지 않아
보스:
차이틀린트, 우린 자네 언니한테 그림을 가르쳐준 적이 있지
차이틀린트:
언니의 사인이네요
보스:
언니 물건이니 챙겨 가렴. 이건 아마 가져갈 수 있을 거야
차이틀린트:
여러분이 보시기에 이 그림은 어떤가요?
보스:
음, 누군가는 십 대에 이미 거장에 버금가는 그림을 그렸고, 그 뒤로는 평생 동심을 추구하는 그림을 그렸다고 하지
보스:
라움힐다의 그림에서는 거장의 기품도, 동심의 순수함도 느껴지지 않아
보스:
대신, 슬픔이 은은하게 베어 있지
페이몬:
과일 그림에서 슬픔이 느껴진다니, 대단하지 않아?
라움힐다:
이 그림엔 동심도 없고, 거장의 기품도 없다고요?
도자:
거장의 기품은 타고난 재능과 뼈를 깎는 연습이 필요하지
도자:
아니면 우리가 가르쳐준 건 잊고, 다시 그려 보는 게 어떤가?
라움힐다:
정말 재미있는 분들이네요
라움힐다:
그림 그리기는 이미 체험해봤으니, 여기까지 할게요. 꽤 재밌었어요
라움힐다:
하지만 완성된 캔버스는 다시 순백으로 돌아갈 수 없고, 배운 것 또한 잊을 수 없는 법이죠
라움힐다:
평범한 작품이라면 그냥 그대로 두는 게 좋겠어요
차이틀린트:
그냥 평범한 작품이었군요
차이틀린트:
그래도 사인은 남겼네요
보스:
그래. 화가는 가끔 의뢰받을 때, 비밀 기법으로 사인을 남기거든
보스:
라움힐다는 이 그림에 《삶이여 영원하라》라는 제목을 붙이고는 떠났지
요시토시:
어때? 언니의 그림을 가져갈 거야?
차이틀린트:
아니요, 여기 두는 게 낫겠어요
차이틀린트:
인간 세상에서는 이 그림이 백 년도 안 되어 분실되거나 훼손되겠지만, 여기서는 영원히 남아 있잖아요
도자:
알겠네
요시토시:
그러고 보니 마우키는 왜 안 보이지? 설마 「모래 위 누각」에 갇혀버리기라도 한 건가?
도자:
너희 심보 참 고약하네. 왜 마우키를 그 공사 현장으로 보낸 거야?
요시토시:
딱히 마우키를 따돌리려는 건 아니야. 그냥 공간에 집착하는 「모래 위 누각」 사람들에게 공간 왜곡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직접 보여주려 했던 것뿐이라고
도자:
공간을 가지고 장난치는 건 규칙을 어기는 일이니, 어쩌면 멜란타가 추방했을지도 모르겠군
도자:
하하하. 첩첩산중도 날 억누를 순 없지. 갈라진 구름 너머로 마침내 하늘이 드러나는구나… 나 도자가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!
도자:
고마워. 라움힐다, 오른쪽이, 그리고 새로 온 친구들
차이틀린트:
전 라움힐다의 동생, 차이틀린트예요
도자:
그렇군. 두 사람 정말 닮았네
차이틀린트:
네, 다들 그러더라고요
도자:
이 두 사람은?
페이몬:
이쪽은 여행자, 난 페이몬이야. 우린 이스토리아의 의뢰를 받고 왔어
도자:
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지. 자네 무예에 일가견이 있는가? 레무리아 제국 군단장쯤은 이길 실력이면 좋겠군
페이몬:
그건 또 무슨 비유야?
도자:
다 사정이 있어서 그래. 레무리아 제국이 멸망했을 때, 변방 요새의 지휘관이 여기로 발탁됐고
도자:
한참 뒤에 고화파 장문인 대행을 자칭하는 늙은이도 여기로 발탁됐지
도자:
그런데 그 둘 사이에 작은 다툼이 벌어졌어
도자:
지휘관이 군에서 음악을 맡는다고 하자, 장문인 대행은 그를 얕잡아봤거든
도자:
하지만 레무리아 제국 군대에선 음악 소양이 높을수록 계급이 높아. 게다가 그 지휘관은 이미 돌이 된 상태였지
도자:
참고로, 레무리아 제국의 핵심 인재들은 영혼 이슬로 변하는 과정을 거쳐 반영생하는 돌인간이 된다고 해
도자:
아무튼 장문인 대행이 지휘관에게 주먹을 날렸지만, 결국 자기 손만 다치고 말았지
페이몬:
으…
도자:
다친 장문인 대행은 부끄러웠는지 변명만 늘어놓더군. 고화파는 비전이 끊겨 몰락해 가고 있고, 자신에겐 신의 눈이 없다고 말이야
도자:
——하지만 신의 눈이 있었다면 애초에 발탁되지도 않았겠지
도자:
이건 여담이지만, 우린 무념무상의 공간에서 고통을 겪었으니, 다시는 신의 눈을 얻을 수 없어
도자:
아무튼 그 지휘관도 가만히 있지 않고, 레무리아 제국의 군단장이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고 큰소리치더군
페이몬:
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네. 여행자에게도 그만한 실력은 충분히 있어
도자:
하하하하, 그거참 잘됐군
페이몬:
근데 넌 왜 그림 속에 있던 거야? 사람 모양의 먹물은 또 뭐고?
도자:
멜란타는 사람들을 그림 속에 가두고 먹물로 만들어 버리는 형벌을 내렸지
도자:
특히 나는 여러 겹의 그림 속에 갇혀 있었고
페이몬:
그럼, 우리가 봤던 먹물이 전부… 사람이었던 거야?
도자:
그래
도자:
미리 말해두는데
도자:
그림이 사실적일수록 영혼이 깃들기 쉬워. 한눈에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으니까
도자:
그러니까 이곳의 사실적인 그림에는 어쩌면 저마다 숨겨진 비밀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지
페이몬:
그럼 우린 이제 뭘 해야 해?
도자:
여기서 이야기하긴 좀 그렇군, 일단 들어가 볼까?
페이몬:
진짜로 순식간에 돌아왔어
차이틀린트:
정말 신기한 곳이네요
도자:
이곳에선 마음의 힘으로 그림을 현실로 만들 수 있어
도자:
마치 암왕제군이 눈을 찍어 용을 만든 듯한 오묘함이 깃들어 있지
페이몬:
그럼 다음엔 뭘 해야 하는 거야?
도자:
서원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면, 먼저 화룡정점으로 이 그림을 복구해야 하지
도자:
《하늘의 마음을 담은 하얀 병풍》
페이몬:
저, 정말 기백이 넘치는 이름이네
도자:
이나즈마 사람들은 원래 이런 이름을 좋아하지
도자:
아마 명광루에 가면, 이 그림을 복구할 수 있을 거야
도자:
하지만 지금은 길이 막혔으니, 금서축으로 가서 명광루로 통하는 길이 있는지 확인해 볼 수밖에 없겠군
페이몬:
이 문 뒤에 있던 거였어?
페이몬:
아까 산과 바다를 가를 정도의 전투력을 지닌 여행자한테 차 보라고 했는데도 꿈쩍도 않더라
도자:
발은 괜찮은가?
여행자:
저려요
도자:
이 문은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라, 일반적인 물질과 달라서 그럴 거야
도자:
이스토리아의 스승 아리스토클레스는 「정신이 물질을 이긴다」고 늘 말했다던데, 아마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?
도자:
그나저나 산과 바다를 가르는 힘이라니, 야타용왕만큼이나 대단하군——
도자:
진리의 공간에 있는 우황의 말로는, 그가 살았던 시대에도 야타용왕이 존재했다고 하던데…
도자:
그렇다면 제군이 눈을 찍어 용을 만들었다는 전설은 그저 후손들이 만들어낸 전설에 불과하겠지. 「그래도 좋은 이야기인 건 사실이지만」
페이몬:
그래서?
도자:
난 그에게 이렇게 말했지. 「내 감동을 완전히 망쳐 놓았군」
차이틀린트:
충분히 이해해요
도자:
휴, 그림 문을 여는 건 화가의 몫이니, 난 문을 열러 가보도록 하지
차이틀린트:
이곳이 놀랍지 않아?
페이몬:
여행자의 경험이 훨씬 더 신기해서 별로 놀랍지 않아
차이틀린트:
정말 대단한 모험을 겪었구나. 세계를 구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
페이몬:
얜 못된 신 때문에 여동생과 떨어졌고
페이몬:
우린 얘 가족을 찾기 위해 모험하고 있어
페이몬:
그러니까 여행자도 네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거야
차이틀린트:
부디 가족을 찾고,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게
페이몬:
아… 미안. 넌 언니를 다시는 볼 수 없지…
차이틀린트:
아니, 내 잘못이야. 그런 의도로 물은 건 아니었어
차이틀린트:
이건 내 진심이야
여행자:
고마워, 차이틀린트
도자:
자, 문이 열렸어
페이몬:
그럼 얼른 출발하자!
「마우키」:
안녕하세요? 에셔라고 합니다. 화가로 활동하고 있죠
페이몬:
오, 네가 바로 이스토리아가 말한 「마우키」구나? 기묘한 그림을 그린다고 들었어
페이몬:
잠깐만…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지 않아?
「마우키」:
제 이름은 마우키가 아니라 에셔입니다
페이몬:
그래? 혹시 실종된 형은 없어?
「마우키」:
없습니다
「마우키」:
우선 따라오시죠. 안전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
페이몬:
우린 안전한 곳을 찾는 게 아니라, 이곳의 문제를 해결하러 왔어
「마우키」:
그런가요? 아무튼 일단 따라오시죠. 문제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
페이몬:
흠, 뭔가 좀 이상한데. 일단 따라가서 뭘 하려는 건지 확인해 보자
도자:
카노, 요시토시, 보스! 다들 살아있었구나!
카노:
아, 그래. 앞으로 병풍은 다신 안 그릴 거야
도자:
너희도 돌아왔구나! 여행자, 페이몬, 그리고 차이틀린트까지!
요시토시:
다들 고마워
보스:
자네, 라움힐다랑 정말 많이 닮았군
차이틀린트:
제가 동생이거든요
보스:
알아, 이 늙은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아직 살아 있거든
보스:
그럼… 차이틀린트, 잠깐 이리 와보려무나
기둥 전당의 수호자는 차이틀린트의 물건을 유물로 여겨, 공간의 신전 곳곳에 나누어 보관했다. 이스토리아는 이곳에 도움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…
차이틀린트:
여행자, 페이몬, 고마워. 마지막에 너희를 알게 되어서 정말 운이 좋았어
페이몬:
아니야. 오히려 넌 우리 때문에 이번 일에 휘말렸는걸
페이몬:
잠깐만. 마지막이라니, 그게 무슨 소리야?
차이틀린트:
비록 위험한 모험이었지만, 신기한 걸 잔뜩 볼 수 있었어
차이틀린트:
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
페이몬:
차이틀린트, 중요한 부분을 슬쩍 넘기지 말라구!
차이틀린트:
내가 그랬나?
페이몬:
이스토리아, 세 구역 다 해방했어. 사람들도 얼추 다 구해냈고
페이몬:
차이틀린트가 잃어버린 물건도 다 찾았어
이스토리아:
정말 고마워! 니힐리타가 눈을 뜬 뒤로 사람 보는 안목이 많이 늘었나 보네!
페이몬:
자, 이제 네 차례야. 저번에 위로 올라가는 방법이랑 그 대가에 대해 얘기했었지?
페이몬:
그냥 모험을 조금 하거나 모라를 쬐끔 쓰는 정도라면, 난 전혀 무섭지 않아!
페이몬:
참, 차이틀린트는 어떻게 내려보낼 거야? 얘는 볼일 다 본 것 같은데
이스토리아:
그건 걱정 말고 일단 좀 쉬어. 설명은 내일 해줄 테니까
페이몬:
응! 근데… 여긴 침대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데?
이스토리아:
이곳에서는 모든 욕망이 멈추지. 아직 눈치채지 못했어? 여기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도 배가 고프지도, 졸리지도 않았잖아?
페이몬:
그럼 대체 뭘 하면서 쉬라는 건데!
이스토리아:
여기에는 여러 역사에서 온 기인과 천재들이 모여 있으니, 대화해 보면 재밌을 거야
페이몬:
알겠어. 하지만 자는 건 내 기본 권리라구. 안 졸려도 여행자 머리 위에서 잘 거야!
이스토리아:
차이틀린트, 좀 쉬고 나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? 내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그 일 말이야
이스토리아:
나중에 따로 찾아와 줘. 알겠지?
차이틀린트:
알겠어요
이스토리아:
여행자, 페이몬. 푹 쉬고 다시 와
이스토리아:
푹 쉬었어? 궁금했던 사람이나, 흥미로운 주제에 대해서도 다 이야기해 봤고?
이스토리아:
그래, 그럼 좀 더 쉬어
이스토리아:
차이틀린트, 침착하게 내 말 잘 들어. 이건 널 못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니야
이스토리아:
아마 네 언니는 죽지 않았을 거야
차이틀린트:
전 묘비까지 봤단 말이에요
차이틀린트:
거기에는 언니 사진이 있었어요
이스토리아:
하지만 관은 텅 비어 있을 수도 있잖아?
페이몬:
나도 차이틀린트의 언니가 무사하길 바라지만, 그건 너무 낙관적인 생각 아니야?
차이틀린트:
언니가 제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결심을 했다고 적혀 있었어요…
이스토리아:
그게 꼭 생을 마치겠다는 뜻은 아니잖아?
차이틀린트:
언니는 아주 먼 곳으로 떠날 거라고 했었어요
이스토리아:
그건 내게도 말했어. 늙기 전에 세계 여행을 하는 게 꿈이라고 말이야
이스토리아:
라움힐다는 아마 세계 여행을 떠났을 거야
차이틀린트:
언니가 그런 이야기도 했군요…
이스토리아:
라움힐다는 밝은 사람이었어. 모두와 사이좋게 지냈지
차이틀린트:
그럼 언니가 우리에겐 다른 가족이 없다고 말했나요?
이스토리아:
그건…
차이틀린트:
조금 차갑게 들릴지는 모르지만, 제 생각은 이래요
차이틀린트:
언니한테는 자신의 죽음을 슬퍼해줄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
차이틀린트:
그래서 언니는 제가 이해해 줄 거라 믿고, 망설임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던 거죠
이스토리아:
아니야,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
차이틀린트:
동정할 필요는 없어요.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이 계셨고, 행복하게 지냈으니까요. 그 기억 덕분에 우리는 성장할 수 있었죠
차이틀린트:
하지만… 어른 세계는 참 힘든 곳이더군요
차이틀린트:
전 내성적이라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었어요. 그래도 외향적인 언니는 잘 지낼 줄 알았죠
차이틀린트:
하지만 어른이 된 언니는 늘 피곤해 보였어요
페이몬:
음…
이스토리아:
그래도 너희에게는 아직 미래가 있잖아
차이틀린트:
아, 언니가 약혼자 이야기도 안 했나 보군요
차이틀린트:
그는 좋은 사람이었어요. 유머 감각도 있었죠. 하, 차라리 나쁜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…
차이틀린트:
그는 유전병 때문에 수명이 짧았거든요
차이틀린트:
그래서 그는 늘 이런 농담을 했어요: 바람신 덕분에 이런 혈통도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고…
차이틀린트:
그러던 어느 날, 그는 세계를 구하러 가겠다고 말한 뒤 떠나버렸어요
차이틀린트:
세계를 구한다라…
차이틀린트:
세계가 아직도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 건… 어쩌면 그가 세상을 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죠
차이틀린트:
당신들은 늘 이렇게 말하잖아요? 「영원한 생명은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.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슬픔에 잠길 테니까」
차이틀린트:
맞는 말이에요. 수명이 짧은 사람은 사랑할 자격조차 없죠
차이틀린트:
그는 생명을 걸고 사랑하려 했지만, 결국 언니에게 더 깊은 상처만 남겼어요
차이틀린트:
심지어 언니를 그 저주받은 요양원에 입원하게 만들었죠
이스토리아:
미안해…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
차이틀린트:
아직도 언니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시나요?
이스토리아:
그래. 네 언니는 여기서 어떤 일을 했거든
이스토리아:
나 같은 겁쟁이 때문에… 네 언니는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됐어
차이틀린트:
전 당신을 존경해요, 이스토리아 씨. 하지만 제 생각에… 당신은 역사 속에서 너무 많은 고난을 지켜본 것 같아요
차이틀린트:
당신이 지켜봐 온 거대한 고난을 한 줌만 뿌려도, 저 같은 평범한 인간의 인생은 묻혀버리겠죠
차이틀린트:
당신은 저와 언니를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
차이틀린트:
다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? 전 하루살이 같은 하찮은 존재예요. 영원을 누릴 자격이 없어요
이스토리아:
하아…
차이틀린트:
이스토리아 씨?
이스토리아:
원래 이곳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장소야. 떠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지
이스토리아:
하지만 니힐리타가 속세로 추락한 이후로, 오른쪽이는 너희 같은 현대인들을 전당과 지상으로 데려다줄 수 있게 됐어
이스토리아:
대신 발탁된 사람은 데리고 갈 수 없지. 오른쪽이는 어린 파수꾼이라 몸에 새겨진 규칙을 어길 순 없거든
페이몬:
뭐? 오른쪽이도 파수꾼이었다고?
이스토리아:
♪~
이스토리아:
발탁된 사람이 정말로 내려가고 싶다면 자신의 지식과 기억을 포기한 뒤,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여주인을 알현해야만 해. 지금은 멜란타고
이스토리아:
그래서 난 너희와 같이 내려갈 수 없어. 그래도 배웅 정도는 해줄 수 있지
사람들이 「진리의 공간」에 있는 책에 갇혀 있다…
페이몬:
그러고 보니… 너희가 쓴 소설은 주제가 뭐야?
페이몬:
음… 그냥! 갑자기 궁금해서…
우황의:
아직 미완이야. 요약하자면: 마신 전쟁 시절에 선인의 술법이 퍼져서 3개의 유파로 발전했는데…
우황의:
나중에 산의 방호파와 바다의 원교종이 서로 싸우자, 절운간의 세 선인이 나서서 갈등을 중재했다는 이야기야
페이몬:
아… 그거, 진짜로 있었던 일이야?
우황의:
없었을 거야.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야말로 소설로 쓸 가치가 있는 법 아니겠어?
칼케리우스:
그리고 오키쿠니는…
칼케리우스:
리월의 《호법선중야차》에 나오는 인물의 성별을 전부 반전시키고는, 제목을 《경국지색 야차전.》이라고 바꿔버렸어
우황의:
마침표를 제목 안에 넣어 놓다니! 그걸 어떻게 참아!
오키쿠니:
에이, 그건 그냥 라이트 노벨을 참고해서 써 본 거야. 등장인물의 성별만 바꿨을 뿐, 줄거리는 그대로잖아?
우황의:
등장인물 성별이 남자 둘, 여자 셋으로 바뀌니까 여자들의 우정과 장렬한 결말이 이루는 대비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어
우황의:
난 그 시대 사람은 아니지만, 리월인으로서 10점 만점에 8점 줄게. 대신 다시는 그런 거 쓰지 마
칼케리우스:
확실히 잘 만들어진 괴작이라 할 수 있겠군. 원작에 흥미가 생길 정도야
종이 인간:
안녕, 라움힐다와 신입 친구들
종이 인간:
아, 오른쪽이도 있었구나
차이틀린트:
제 이름은 차이틀린트예요. 라움힐다는 제 언니죠
종이 인간:
그렇구나. 자매끼리 정말 꼭 닮았네
종이 인간:
내 이름은 오키쿠니. 후손의 말을 빌리자면… 오니와 요괴가 세상을 활보하고, 나루카미 열도가 통일되기 전의 시대에서 왔다고 해야겠군
종이 인간:
난 칼케리우스라고 해. 레무리아 제국 시대 사람이지
종이 인간:
내 이름은 우황의. 천형산 아래 산휘채가 있고, 귀리집이 세워지기 전 시대 사람이야
종이 인간:
참고로 레무리아 출신 사람들은 새로 합류한 변방 민족만 빼고 전부 돌이 됐으니까, 보고 놀라지 마
종이 인간:
돌이 아니라 영혼 이슬로 변한 거라고!
페이몬:
우와, 세 인격이 자유자재로 바뀌네!
종이 인간:
그게 아니라 우린 지금 책 속에 있는 거야!
종이 인간:
넌 좀 닥쳐. 네가 《에리니에스》를 뜯어고치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런 꼴이 되진 않았을 거야!
종이 인간:
아니, 이건 누가 봐도 오키쿠니 책임 아냐?
종이 인간:
아무튼 이곳은 「진리의 공간」이야. 진리의 도서관이나 진리의 장서각 같은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어
종이 인간:
보다시피, 우린 벌을 받아 책 속에 갇혔지
종이 인간:
저기… 일단 오른쪽이한테 우릴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라고 한 다음에 얘기하면 안 될까?
차이틀린트:
이건… 언니와 내가 서로 주고받은 편지야
페이몬:
개인적인 물건이네. 우린 보지 말자, 여행자
차이틀린트:
특별한 내용은 딱히 없어. 그냥 언니가 심심해서 쓴 편지야
차이틀린트:
산속 요양원은 공기가 맑고 노인도 많아서 지내기 편하지만, 따분하거든
차이틀린트:
그래서 언니는 종종 묘지에 가서 묘비명을 읽곤 했대. 타향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으니까
차이틀린트:
그리고 언니는 요양원이 철거될 예정이니, 이제는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어
차이틀린트:
그러던 어느 날, 언니가 갑자기…
차이틀린트:
곧 아주 먼 곳으로 떠날 예정이니,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어…
페이몬:
…아
우황의:
뭐? 네 언니는 아주 밝고 말도 잘하던데?
차이틀린트:
…그 후 전 바람 멎은 산에서 언니의 묘비를 봤어요
페이몬:
미안, 또 아픈 상처를 건드려 버렸네…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어
차이틀린트:
위로는 필요 없어. 인생의 후반부는 이별의 연속이니까
우황의:
…만남과 이별이란 덧없는 것이지
우황의:
유감이야. 그런 일이 있었다니…
우황의:
라움힐다가 여기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발탁 시스템이 엉망이 돼서 다들 의기소침해져 있었어
우황의:
안 그래도 멈춰 있던 시간은 완전히 의미를 잃고 공허해졌지
우황의:
착한 라움힐다가 와 준 덕분에 다들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던 거야
차이틀린트:
분명 그랬겠죠
차이틀린트:
사실 난 작별하러 왔기 때문에 너희의 이름을 묻지 않았던 거야
차이틀린트:
난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. 더 이상 누군가와 작별하고 싶지 않아
페이몬:
우린 그런 거 딱히 신경 안 써. 지금이라도 서로 알게 됐으니 된 거잖아?
여행자:
작별이 있어야 재회도 있는 거야
차이틀린트:
너희처럼 활기찬 사람과 모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
차이틀린트:
다 커서 이런 기회가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어
우황의:
우리도 네 언니 덕분에 그런 기분을 느꼈어
페이몬:
차이틀린트가 잃어버린 물건은 되찾았으니까, 이제 남은 건 여기 있는 「복원 코어」를 처리하는 것뿐이네
우황의:
좋아. 이제 멜란타는 이 구역의 통제권을 잃었을 거야
우황의:
아, 그리고 차이틀린트…
차이틀린트:
왜 그러세요?
우황의:
아까 내가 한 말에 틀린 부분이 있어서, 좀 정정하려고
우황의:
삶은 모험이고, 인생은 긴 여정이야
차이틀린트:
긴 여정을 버텨서 뭐가 좋죠?
우황의:
여행자, 페이몬, 그리고 나를 만났잖아. 이곳에도 도착했고
우황의:
비록 지금은 난장판이지만, 이곳에 발탁되어 영생을 누리게 된 건 큰 행운이야
우황의:
너도 아까 여기서 살고 싶다고 했잖아. 어때? 여기서 지낼래?
차이틀린트:
여기는 좋은 곳이에요
차이틀린트:
모두가 지혜롭고 순수한 마음을 지녀서, 사이좋게 지내죠
차이틀린트:
하지만…
우황의:
그럼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, 일단 돌아가자. 오키쿠니랑 칼케리우스가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야겠어
오키쿠니:
대단한데?! 정말로 해내다니!
오키쿠니:
최소 신임 군단장급 전투력은 되겠어
칼케리우스:
신임 군단장이라고 전투력이 다 같은 건 아니야. 골렘 육체도 있고, 협률자나 협률자 후보도 있고, 협률자에 골렘이 더해진 경우도 있어
칼케리우스:
그걸 전부 동급으로 취급할 수는 없지
우황의:
시끄러워. 마지막 코어가 네 망할 소설 안에 숨겨져 있어서, 널 때리고 싶을 정도로 고생했다고!
칼케리우스:
난 영혼 이슬 상태라 때려봤자 네 손만 아플걸?
우황의:
그게 바로 내가 고화 무술로 널 때리지 않은 이유지
페이몬:
우왓! 종이 인간이… 입체 인간이 됐어!
칼케리우스:
이건, 뭐랄까…
오키쿠니:
기분 끝내주는데!
우황의:
마지막으로 기지개를 켠 게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네
페이몬:
그래서, 너희는 어쩌다 종이 쪼가리가 된 거야?
우황의:
후세의 리월 소설을 읽고 과몰입한 오키쿠니가 책 속으로 들어갔어
우황의:
본인에게 신임 백인대장급 전투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나 봐. 그래서 종이 인간이 되어버린 거지
오키쿠니:
이봐, 농담하지 말고 진지하게 대답해
칼케리우스:
이곳에 발탁되어 온 뒤로 우리는 온갖 기이한 이야기를 서로 공유했어. 그러다 속세에 있을 때의 버릇이 다시 도져서 소설을 쓰게 됐지
우황의:
무념무상의 공간에서 겪는 고통과 수행은 의지와 욕망을 없애지. 이건 우연하게도 참삼시라 불리는 오래된 리월 술법과 엇비슷해
우황의:
하지만 사라진 창작욕은 좋은 아이디어를 들으면 금세 다시 살아나거든
칼케리우스:
맞아. 「포보스」에 대한 내 믿음은 무념무상의 공간 속에서 닳아 없어져 버렸지만,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만은 사라지지 않았어
우황의:
그래서 우리는 파수꾼한테 벌을 받았지. 하긴 오키쿠니의 글을 보면 누구라도 이렇게 생각했을 거야:
칼케리우스:
「뭐 이런 괴상한 글이 다 있어. 그런데 또 묘하게 흥미롭네?」
우황의:
우리 리월 후손들의 원작이 훌륭해서 그런 거야
오키쿠니:
헛소리 좀 그만해. 쟤네들은 진짜인 줄 안다고
오키쿠니:
아무튼 멜란타는 우리 창작물을 오염이라고 판단했어. 현실과 허구를 헷갈리게 만들고, 순수하고 올바른 풍조까지 더럽힌다나?
오키쿠니:
물론 우리 소설에는 실제 역사와 학술 내용이 섞여 있긴 하지만…
우황의:
파수꾼의 원칙과 네가 쓴 글은 별개의 문제지
우황의:
그건 그렇고, 차이틀린트, 넌 다섯 야차 대장 중에 누가 제일 마음에 들어?
우황의:
네 언니가 너한테도 야차 얘기를 들려줬다고 했거든. 걘 등사가 제일 좋다고 했어
우황의:
당시에도 우리는 책 속에 갇혀 있었어. 그래도 네 언니는 우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지
차이틀린트:
저는 금붕 대장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. 정말 강인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거든요. 저와 언니는 그 야차처럼 강인해질 수 없을 거예요
페이몬:
내친김에 나도 하나만 물어볼게. 이곳을 원래대로 되돌리고, 다른 사람들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?
우황의:
그건 내친김에 할 말이 아니지.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
페이몬:
뭐야, 알고 있으면 그런 걸 먼저 물어봤어야지!
칼케리우스:
아까 오른쪽이가 건드렸던 물건이 핵심이야. 대략 공간 조작 후에 남겨진 역조작 데이터 같은 거지
칼케리우스:
그 물건은 아직 이름이 없어. 부르기 불편하니까 적당한 이름을 지어야 할 텐데
우황의:
난 「해방의 돌」에 한 표. 아무래도 해방하는 데 쓰는 물건이니까
칼케리우스:
난 「희망의 열쇠」가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? 거기에는 희망이 들어있잖아
페이몬:
에잇! 어차피 우리가 찾을 거잖아
이스토리아:
!
페이몬:
——어차피 우리랑 오른쪽이가 찾을 거잖아. 그냥 우리가 정할래
페이몬:
음, 「복원 코어」라고 부르자! 이의는 받지 않겠어!
우황의:
상관없어. 이곳이 해방되면 그걸 다시 볼 일도 없을 테니까
오키쿠니:
그렇네. 다시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
칼케리우스:
좋아, 그럼 부탁 할게
칼케리우스:
우리 셋은 힘을 합쳐봤자 풋내기 병사 수준이니까 그냥 빠질게
오키쿠니:
레무리아 출신 아니랄까 봐 레무리아 병사의 전투력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네. 겸사겸사 자기 자신도 올려치면서 말이야
칼케리우스:
아무튼 도서관 입구는 저쪽이야. 오른쪽이가 있으니 문을 금방 열 수 있을 거야
페이몬:
너희는 전당 중심부로 돌아가. 거긴 안전해. 이스토리아랑 요세푸스도 그곳에 있을 거야
우황의:
너희는 계획대로 대피해. 나는 남아서 길을 안내할게
칼케리우스:
조심해, 네 소설은 아직 미완성이니까
오키쿠니:
우리도 안전하다는 것만 알리고 바로 돌아올게. 또 종이 쪼가리가 되지 않게 조심하라고
페이몬:
휴! 참 독특한 경험이었어
페이몬:
기분이 어때?
페이몬:
고마워, 차이틀린트!
차이틀린트:
아냐, 더 큰 위험을 감수한 건 너희잖아
페이몬:
이스토리아! 너도 왔구나?
이스토리아:
응, 칼케리우스한테 들었어. 너희가 진리의 공간에서 힘을 써줬다면서? 덕분에 일이 잘 풀릴 것 같아
페이몬:
에헤헤, 너무 맞는 말만 해주니까 좀 쑥스럽네
이스토리아:
차이틀린트, 잃어버린 물건은 찾았어?
차이틀린트:
찾았어요
여행자:
그러고 보니…
여행자:
나도 여기에 온 목적이 있었지
차이틀린트:
응, 너희는 쭉 나를 도와주기만 했잖아
차이틀린트:
그 공허의 수호자가 한 말은 이해하지 못했지만, 여기에 너에게 중요한 게 있다는 건 알고 있어
이스토리아:
여행자,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. 이제 네가 원하는 걸 들어줄 차례네
당신은 지금까지 겪은 일과 니힐리타가 한 말을 들려줬다.
그다음 이곳에 동생의 단서가 있는지 물었다
이스토리아:
정말 놀라운 이야기야
이스토리아:
학창 시절에 이 질문을 받았다면 한참 고민했겠지
이스토리아:
난 여기서 가장 오래 살아온 사람이라 웬만한 일은 다 알고 있거든. 그런데 애석하게도… 모르겠어
이스토리아:
다만, 신전 가장 높은 곳에는 신과 파수꾼이 거주하는 「비유비무의 전당」이 있는데, 그곳엔 비밀이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있어
이스토리아:
하지만 그곳에 올라갈 배짱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
페이몬:
왜?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겁먹을 만큼 높은 곳에 있어서?
이스토리아:
모든 기억을 포기해야만, 그 전당에 들어갈 수 있거든
이스토리아:
신전 주인을 알현하는 건 해답과 해방을 얻기 위해서잖아? 그러니 이곳에서의 기억이 지워지는 것도 당연하지
이스토리아:
오직 본인의 기억과 지식으로 승천의 길을 만들어야 신성한 저편에 닿을 수 있는 법이니까
페이몬:
기억이 만질 수 있는 물건도 아닌데, 그걸로 어떻게 승천의 길을 만든다는 거야?
이스토리아:
이곳은 특별한 장소야. 신의 위대한 힘은 「무」와 「유」를 서로 뒤바꿀 수 있지
이스토리아:
이곳은 없다는 개념 자체가 달라서 진공 상태는 무로 간주되지 않아. 신이 보기엔 진공은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채워질 수 있는 상태니까
이스토리아:
의미조차 없는 「공허」한 상태야말로 신조차 범접할 수 없는 것이지
이스토리아:
승천의 길은 아마 너희가 도서관에서 봤던,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이 안 되는 장면과 비슷할 거야
이스토리아:
난 겁이 많아서 거기로 올라가 볼 엄두조차 못 냈어. 내게 주어진 책임을 포기할 용기가 없거든
이스토리아:
난 과거를 목격하고 후손을 통해 미래를 배우며, 귀중한 기억을 담는 그릇일 뿐이야
이스토리아:
다시는 지상으로 돌아갈 수 없더라도, 이 잃어버린 문명들의 기억만큼은 간직하고 있어야 해…
차이틀린트:
신이란 참으로 잔혹하네요. 그렇게 잔인한 선택을 강요하다니…
페이몬:
신 중에는 착한 신도 있고, 나쁜 신도 있어. 예를 들면 여행자의 여동생을 잡아간 신은 아주 나쁜 녀석이지!
이스토리아:
어쩌면 반대일 수도? 승천의 길 규칙을 설계한 신은 신전의 주인이 아니거든
이스토리아:
애초에 이곳을 떠나려면 모든 역사와 비밀 그리고 지식을 두고 가야 해
이스토리아:
그리고 「기억과 지식으로 승천의 길을 만든다」는 표현은, 내가 보기엔 너무 감성적이야
이스토리아:
인간 세계로 돌아가려면 기억을 지워야하는데…
이스토리아:
그래도 그 규칙 덕분에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과 지식이 어떤 길을 만들어 냈는지 볼 권리를 갖게 된 거지
페이몬:
그러니까,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태워 버려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데…
페이몬:
소설을 불태우기 전에 후일담과 하이라이트를 볼 권리가 추가됐다는 거지?
차이틀린트:
줄거리는 사라지지만, 감동과 분위기는 남는다는 거네
이스토리아:
완벽히 이해했구나!
이스토리아:
그 비유를 들으니, 예전에 가르쳤던 한 학생이 떠오르네. 그는 남쪽에 있는 델포이·피토로 떠났지
이스토리아:
현대에서는 그곳을 뭐라 부르는지 모르겠군. 그 학생이 전쟁에서 살아남았는지도 모르겠고
이스토리아:
그 학생의 이름은 아브락스였어.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, 다들 모르더라.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는 못한 모양이야
이스토리아:
이야기가 딴 데로 샜네.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
페이몬:
좋아! 그래서, 결국 어떻게 하면 위로 올라갈 수 있어?
페이몬:
여행자의 기억은 중요하다구. 이런 식으로 잊어버려서는 안 돼
페이몬:
게다가 나랑 여행자 사이에도 「처음부터 다시 시작」하고 싶을 정도로 큰 갈등은 없거든
차이틀린트:
제가…
이스토리아:
걱정할 필요 없어
차이틀린트:
……
이스토리아:
모두를 구하고 나면, 그 일은 내가 처리할게. 사실 승천의 길의 원리는 이미 알아냈거든
이스토리아:
신이 부재 중이라 규칙에 문제가 생겨서, 저번에 만들어진 승천의 길이 사라지지 않았어
이스토리아:
분노한 멜란타가 절반을 파괴했지만, 남은 반쪽 길은 아직 희미하게 보여
이스토리아:
즉, 다른 사람이 만든 승천의 길도 밟고 올라갈 수 있다는 뜻이지. 이제 그걸 고치기만 하면 돼
페이몬:
너, 설마…
이스토리아:
아니야. 말했잖아, 난 기억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어서, 죽을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라고
차이틀린트:
이스토리아 씨…
페이몬:
마지막 「복원 코어」는 어디 있어?
우황의:
아마도, 이 책 안에 숨겨져 있는 것 같아
우황의:
이 책은 칼케리우스가 번역한 《기사 에어리니 이야기》야. 원작은 후세 사람이 쓴 《에리니에스》지
우황의:
그런데… 번역이라기보다는 거의 새로 쓴 것에 가깝더라
우황의:
이스토리아는 이 책이 실재론에서 유명론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라며 높게 평가했어
페이몬:
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!
차이틀린트:
꼭 한 번 읽어 보고 싶네요
페이몬:
아무튼 「복원 코어」를 어떻게 회수할지, 짐작 가는 거 있어?
우황의:
여기서는 도서관의 힘으로 장면을 구현할 수 있어. 「복원 코어」는 책 속에 숨겨져 있을 거야
우황의:
여행자, 네가 직접 책 속으로 들어 가야 해
우황의:
너도 종이 인간이 되는 기분을 한번 느껴 봐
여행자:
하지만 저는 입체적인 존재인데…
페이몬:
무슨 문제가 생기면 내가 오른쪽이랑 같이 힘을 합쳐서 구해줄게!
여행자:
나한텐 최고의 가이드가 필요해
페이몬:
어쩔 수 없네. 그럼 나도 같이 가 줄게
페이몬:
우황의 실수하면 안 돼!
우황의:
사실 성공 여부는 차이틀린트에게 달려 있어
차이틀린트:
네?
우황의:
이 책은 멜란타에 의해 검열되고, 조작됐어. 이유 없는 악의가 잔뜩 담겨 있지
우황의:
그리고 나는 기존 《에리니에스》와 《에어리니》 이야기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, 결말을 즉흥적으로 바꾸기 힘들어
우황의:
이 책의 결말은 비극인데, 지금은 희극으로 바꿔야하거든
페이몬:
그럼 어떻게 해야 해?
우황의:
차이틀린트가 책에서 나타나는 모든 위기를 임기응변으로 해결해서, 줄거리를 좋은 결말로 유도해야 해
차이틀린트:
제가 이 둘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고요?
차이틀린트:
게다가 이야기를 해피 엔딩으로 이끌어야 한다니…
차이틀린트:
전 무엇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에요
페이몬:
우리는 널 믿어!
우황의:
이건 삶이 아니라 모험이고, 모험 이야기에서는 용감한 자에게 좋은 일이 따르는 법이야.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잖아?
차이틀린트:
…알겠어요, 한번 해볼게요
페이몬:
우왓, 함정이었네
페이몬:
차이틀린트, 어디 다친 데는 없어?
차이틀린트:
여행자 덕분에 멀쩡해
차이틀린트:
역시 나는 짐덩어리였구나
페이몬:
아냐, 절대 그렇지 않아!
우황의:
짐덩어리는 나겠지. 다들 내가 무사한지조차 신경 쓰지 않잖아?
페이몬:
이봐, 아까 내가 떨어지는 여행자(이)랑 널 붙잡고 있었잖아
우황의:
날 붙잡고 있었다고? 충돌 방지 쿠션으로 쓰려던 게 아니라?
페이몬:
이봐, 난 날 수 있다고. 너희를 구하려다 떨어진 거지!
우황의:
아 녜녜~ 다 내가 무거워서 그런 거겠지
차이틀린트:
풉
페이몬:
차이틀린트가 웃었다! 우황의, 우리 호흡이 척척 맞는데?
우황의:
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, 차이틀린트